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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일기

『싸이 - 아버지』

by ldj0214 2024. 3. 27.

2024. 03. 27. 수
오늘의 곡은 싸이의 아버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잔혹한 질문에
난 곤란한 기색 없이 '엄마가 좋아' 라고 외쳤다.
남을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와 잘 모르는데 아는척하는 습관,
자신만 챙기는 서투른 센스와 동그랗게 벗겨진 머리,
아부지의 사소한 단점들이 눈에 속속히 보여서
어릴 땐 아부지보다 어무니를 더 좋아하였다.
 
그런 아부지가 웬일로 내 자취방에 놀러 왔다.
자기 회사에서 커다란 페스티벌을 하는데,
무료 티켓이 생겨 그거 보러 가는 김에
나랑 같이 서울 구경하려고 3박 4일동안 채류할거라고 하셨다.
어디 놀러 가면 항상 어무니, 아부지, 나 셋이서 갔는데
아부지랑 단둘이 놀러 가는 건 유치원 때 이후로 처음이어서 조금 긴장했다.
아부지랑 단둘이 콘서트도 보고, 경복궁도 가고, 인사동 거리에 맛집 탐방까지.
상대가 아부지말고 여자친구였으면 완전 10점 만점의 10점인 데이트 코스였을 거다.
그래도 아부지의 수박 겉핥기 지식으로 내 귀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어
내가 싫어하던 '잘 모르는데 아는척하는 습관'이 적게나마 도움이 되었다.
 
알찬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아부지와 취중 진담을 하니
처음 듣는 아부지의 괴로운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돈이 너무 없어서 김치랑 밥만으로 일주일을 버텼다는 이야기,
연봉 좋은 회사지만 아부지의 능력을 시샘한 사람들이 아부지를 따돌렸던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얼굴은 헤실헤실 웃어도 머리는 단숨에 숙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싫어하던 아부지의 성격이 옛날의 트라우마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면,
험한 사회를 견디기 위해 얻어낸 아부지만의 방식이라 한다면,
나 같아도 그렇게 적응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아부지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냥 그런 모습들을 싫어하기만 했지 과연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을까.
나를 되돌아보며 아부지와의 관계가 이전보다 호전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어느덧 4일이 훌쩍 지나 아부지가 본가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옷 대충 입고 집 앞 역에서 안부 인사 하니까
아부지는 ?를 연신 얼굴에 띄우며
"나 가는데 말동무는 해줘야지 않겠니"라고 말하셨다.
보통 "됐어, 추운데 들어가"라는 말을 하지 않나?
에라 모르겠다 하고 40분이나 되는 거리를 지하철 타고 서울역까지 가다가
"그럼 내가 집에 갈 때 말동무는 누가 돼주나요"라고 물어보니
잠시 머뭇거리며 거기까진 생각 못했다는 듯이 할 말을 잃고 눈알을 열심히 굴리셨다.
역시 아부지는 변함없이 서투르구나. 
동그랗게 벗겨진 아부지의 머리가 아주 조금 귀엽게 보였다.
아주 조금.
 
예상치 못하게 아부지의 또 다른 일면을 알게 된 정말 뜻깊은 4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버지가 되면 자식들은 나를 이해해 주려나.
간접적으로라도 나를 깨닫게 해주신 아버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젠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에 곤란한 기색 없이 이렇게 대답할 거다.
 
...
'둘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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